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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목욕탕, 점점 사라져 가는 엄마가 남긴 온기

by jay kimu 2026. 1. 8.

사라질 준비를 하는 엄마와 다시 모이는 가족

2016년 개봉한 나카노 료타 감독의 영화 <행복 목욕탕>은 제목만 보면 따뜻한 가족극처럼 느껴지지만, 막상 보고 나면 마음 한쪽이 오래도록 저릿하게 남는 작품입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미야자와 리에가 연기한 엄마 ‘후타바’가 있습니다.

남편은 대단치도 않은 이유로 집을 나가 버렸고, 후타바는 딸 아즈미와 둘이서 편의점 일을 하며 겨우 생활을 이어 갑니다.

 

팍팍하지만 어떻게든 버티던 어느 날, 그녀는 자신에게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예고됐지만, 영화는 여기서 통속적인 슬픔이나 오열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대신 후타바가 그 이후에 “이제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움직이는 모습을 차분히 보여줍니다

 

후타바가 내린 결론은 단순하지만 무겁습니다. 흩어진 가족을 다시 불러 모으고, 문을 닫았던 친정 집 목욕탕을 손수 복구해 딸에게 ‘집’이라는 구체적인 터전을 남겨 주는 것. 관객 입장에서는 너무 무리해 보이고, 경제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쉽지 않아 보이는 계획이지만, 한편으로는 엄마라는 존재라면 한 번쯤 떠올릴 법한 선택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의 시도를 말리기보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됩니다.

<행복 목욕탕>의 첫 번째 매력은, 죽음을 앞둔 인물을 불쌍한 희생자로만 소비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가는 사람’으로 그려 낸다는 데 있습니다. 후타바는 병의 진행 상황보다 오늘 해야 할 일, 오늘 챙겨야 할 사람에게 더 집중하고, 그 태도가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합니다.

행복목욕탕


목욕탕이라는 공간에 스며든 기억과 화해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동네 목욕탕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건조하게 식어 있던 탕을 다시 닦고, 녹슨 배관을 갈아 끼우고, 오래된 간판에 불을 다시 켜는 과정은 단순한 리모델링이 아니라 멈춰 있던 가족 역사를 다시 흐르게 만드는 의식처럼 보입니다.

 

물이 다시 끓기 시작하자, 동네 사람들도 하나둘 목욕탕을 찾아옵니다.

퇴근 후에 들른 회사원,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 동네 사정을 훤히 아는 단골 손님들까지, 각자의 피로와 고민을 안고 탕 안으로 걸어 들어옵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동안만큼은 모두가 직업과 체면을 벗어 던지고 그날 있었던 일들을 자연스럽게 풀어놓습니다.

후타바 가족 역시 이 공간을 오가며 서로의 상처를 조금씩 드러내고,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감정을 조심스럽게 꺼내 놓습니다.

 

일본식 정서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공중목욕탕 특유의 풍경이 향수처럼 다가오고, 한국 관객에게도 오래된 동네 목욕탕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키는 장면들이 많습니다.

 

증기로 가득 찬 타일 벽, 빛이 반사되는 물결,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물 튀기는 소리와 수건 부딪히는 소리 같은 것들이 화면을 채우면서, 영화의 정서는 점점 더 ‘따뜻한 습기’에 가까워집니다.

결국 이 목욕탕은 인물들이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 서로를 다시 받아들이는 장소가 됩니다.

단순한 배경이나 소품이 아니라, 상처와 피로를 씻어내는 하나의 거대한 그릇처럼 기능하는 것이죠.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 잔잔한 위로

<행복 목욕탕>의 가장 큰 장점은, 설정만 놓고 보면 시종일관 눈물을 쏟게 만들 수 있는 이야기인데도 끝까지 감정을 절제한다는 점입니다. 후타바는 분명 말기 암 환자이지만, 자신을 비극의 중심 인물처럼 연출하지 않습니다.

 

몸은 점점 약해지고 숨이 차오르지만, 가능한 한 평소처럼 일상을 유지하려 하고, 상황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농담을 던지기도 합니다.

 

딸에게 잔소리를 하다가도, 문득 진심 어린 말을 꺼내며 마음을 전하려 애씁니다. 관객이 울컥하는 순간은 “이제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직설적인 대사가 나올 때가 아니라, 함께 밥을 먹고, 서로의 등을 밀어 주고, 아무 말 없이 나란히 탕에 앉아 있는 아주 사소한 장면들입니다.

 

나카노 료타 감독은 죽음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감정을 쥐어짜기보다, 그 죽음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더 소중해지는 하루의 디테일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서 엔딩 자막이 올라갈 때 남는 감정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나도 내 사람들에게 조금 더 다정해져야겠다”는 조용한 다짐에 가깝습니다.

 

가족과의 관계가 어색해졌을 때, 혹은 삶이 너무 버겁게 느껴질 때, 이 영화는 과한 설교 대신 “따뜻한 물에 잠깐 몸을 담그고 쉬어 가라”는 식의 위로를 건네는 작품입니다.

큰 반전이나 자극적인 장면은 없지만, 보기 전과 후의 마음 온도가 미세하게 달라지는 경험을 하고 싶다면, <행복 목욕탕>은 언젠가 한 번쯤 천천히 찾아볼 만한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