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된 딸을 쫓아 한 남자가 밟아 들어가는 지옥
<갈증>은 표면적으로는 “실종된 딸을 찾는 아버지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포장지를 찢고 나면 거의 지옥도에 가까운 세계가 펼쳐지는 영화입니다.
주인공 후지시마 아키카즈는 한때 형사였지만, 아내의 불륜 현장을 차로 들이받는 바람에 인생이 내려꽂힌 인물입니다.
집도, 가족도, 직업도 잃고 지금은 경비원으로 겨우 일하며, 우울과 분노 사이를 오가는 반쯤 망가진 상태죠.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전처로부터 연락이 옵니다. 고등학생 딸 카나코가 사라졌다는 것. 아키카즈는 오랜만에 “아버지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인 듯 집착적으로 딸을 찾아 나서지만, 발을 디딜수록 딸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믿었던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학교에서 카나코의 평판은 “신 같다”는 말이 나올 만큼 좋은 모범생, 모두가 좋아하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방 안에 숨겨둔 약 봉지와 수상한 서류봉투, 밤마다 사라졌던 행적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착한 딸’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 드러납니다.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그를 단번에 인기 있는 학생으로 만들어 주던 카나코는, 동시에 약과 섹스, 폭력을 도구처럼 사용하며 주변 사람들의 삶을 뒤틀어 놓습니다.
영화는 이 과정을 직선적으로 풀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교차 편집해 관객을 혼란 속에 던져 넣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딸이 어디 있느냐”보다 “이 아이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던 거냐”가 더 궁금해지죠.
아키카즈가 학교, 병원,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듣는 증언들은 서로 모순되기도 하고, 각자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 뒤죽박죽 된 조각들을 맞추다 보면, 관객은 자연스럽게 한 가지 사실을 체감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한 가족의 비극을 넘어, 사회 전체에 스며든 폭력과 무책임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짓뭉갤 수 있는지에 대한 아주 어두운 우화라는 것 말입니다.

천사와 괴물 사이, 카나코를 둘러싼 불편한 퍼즐
<갈증>이 유독 강렬하게 남는 이유는, 카나코라는 캐릭터 자체가 ‘선/악’이라는 단순한 잣대로는 도저히 정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의 회상 속에서 카나코는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를 구해 주고, 외톨이를 단번에 인기인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구원자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왕따를 당하던 남학생에게 먼저 말을 걸고, 그를 중심으로 새로운 무리를 만들어 주는 장면들은 얼핏 보면 청춘 드라마의 한 컷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화는 곧장 그 이면을 보여 줍니다. 카나코의 도움은 공짜가 아니고, 언제나 어둠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녀는 약과 섹스, 폭력을 섞어 사람들을 자기 내면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누군가의 약점을 손에 쥐고, 필요할 때마다 그 약점을 살짝 비틀어 관계를 통제하고, 가정 안에서는 폭력적인 아버지와 외도 중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났고, 학교 밖에서는 야쿠자와 부패 경찰이 얽힌 더러운 사건 속에 깊게 파고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카나코는 분명 구조적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그 피해의 고통을 똑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가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이 상황을 끝까지 풀어 주지 않습니다.
“그래도 불쌍한 아이야”라는 단정도, “원래부터 타고난 악마였어”라는 단정도 허락하지 않죠.
관객은 내내 불편한 질문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아이를 어디까지 이해해 줘야 할까?” “이 모든 게 정말 개인의 타락일 뿐일까, 아니면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지옥의 부산물일까?”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특유의 화려한 색감과 음악, 과감한 몽타주는 이런 혼란을 의도적으로 증폭시키는 장치입니다.
장면들은 종종 뮤직비디오처럼 현란하게 튀다가도, 어느 타이밍에서는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현실을 들이밀죠.
그 속에서 카나코의 얼굴은 천사와 괴물 사이를 계속 오가고, 관객은 끝내 어느 한쪽으로도 마음을 완전히 기울이지 못한 채 끝을 맞이하게 됩니다.
나카시마 테츠야식 폭력과 보기 힘든면서도 눈을 돌리기도 어려운 세계
이 영화는 분명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릴 수밖에 없는 작품입니다.
폭력 수위가 상당히 세고, 약물·성폭력·학교 폭력·가정 폭력 등 거의 모든 종류의 어두운 요소가 한데 뒤엉켜 있기 때문입니다.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이전 작품들에서도 인간의 추악함과 파괴적인 감정을 특유의 스타일로 그려 왔지만, <갈증>에서는 그 강도가 한 단계 더 올라간 느낌입니다.
이야기 속에는 전통적인 의미의 구원이나 카타르시스가 거의 주어지지 않습니다.
주인공 아키카즈 역시 관객이 온전히 감정 이입하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딸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지만, 그 밑바탕에는 딸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라기보다는 자기 파괴와 피해의식, 뒤틀린 자존심이 깔려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는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고, 필요하다면 상대를 가차 없이 짓밟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키카즈는 ‘영웅적인 아버지’라기보다는, 이 세계가 만들어 낸 또 하나의 괴물에 가깝습니다.
결국 영화가 보여 주는 것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대결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류의 파괴된 인간들이 부딪히며 더 큰 상처를 남기는 풍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증>이 단순한 자극용 문제작으로만 남지 않는 이유는, 그 폭력의 배후에 있는 구조를 끝까지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부패한 경찰은 사건을 덮는 데만 급급하고, 야쿠자는 청소년들을 값싼 상품처럼 소비합니다.
학교는 체면과 성적에만 관심이 있고, 가정은 이미 오래전에 기능을 잃었습니다.
이 틈바구니 속에서 아이들은 서로를 괴롭히고, 이용하고, 버립니다.
카나코 역시 그 구조 한가운데서 망가져 간 존재입니다.
영화는 “이건 저 사람들의 이야기야”라며 선 긋고 빠져나갈 틈을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의 과장된 반영인지 애매한 지점을 계속 찌르면서, 관객에게 묵직한 피로감을 선물합니다.
개인적으로 <갈증>은 기분 전환용으로 틀었다가는 크게 데이기 좋은 영화라고 느꼈습니다.
다만 인간의 어두운 면, 폭력과 위선이 뒤엉킨 세계를 끝까지 직시해 보고 싶은 분,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특유의 강렬한 연출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한 번쯤 도전해 볼 만한 작품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실종된 딸을 찾는 아버지 이야기”라는 한 줄 요약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아주 복잡하고 불편한 감정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거라는 것 입니다.